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세가와 요시미치 (문단 편집) === 제2대 조선총독 === || [[파일:/pds/200903/07/25/a0116025_49b241028f7ec.jpg|width=100%]] || || [[영친왕]]에게 경례하는 [[하세가와 요시미치]](제2대 [[조선 총독]]으로 재임 당시.)[* 하세가와가 [[화족]]이긴 했지만 영친왕은 화족보다 높은 [[왕공족]]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장면이 연출된 것. 당연히 이런 태도를 통해 "일본이 구 한국 황족을 존중한다"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속임수이자 허울이었다.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구한국 황실은 강제병합 이후 일본에서 천황(소위 '덴노')가 다음 가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. 즉,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[[한반도]] 내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지만, [[고종(대한제국)|李太王]]과 [[순종(대한제국)|李王]]에 대한 것은 건드릴 수 없었다.--물론 구 한국황실은 실권은 없던데다가 왕공족 본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사항 외에 그 주변에 대하여서는 언제든지 강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--] || 1916년 제2대 [[조선 총독]]에 임명된 하세가와는 [[데라우치 마사타케|전임 총독]]에게서 [[무단통치]]를 계승했다. 다만 [[하세가와]]는 애초부터 정치에 문외한인 철저한 군인 출신이므로 노련한 데라우치와 달리 자신만의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다. 그래서인지 [[3.1 운동]]을 강경진압했지만, 국내 역사책이나 언론에서 전임 총독인 데라우치에 비해 다뤄지는 빈도가 훨씬 적다. 특히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가 [[조선총독부]]를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[[하세가와]]는 '전임자의 행정적 자취를 답습'한다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으며 데라우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[[조선총독부]] 관료들이 [[하세가와]]의 말은 따르는 척 하면서도 수면 아래에선 그의 명령에도 복지부동으로 일관했다. 거기에 하세가와의 금전적 탐욕 때문에 부하 관료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배신자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판국이었다. 이러한 [[하세가와]]의 토색질 때문에 [[무단 통치]]의 근간이 되는 [[일본 육군]]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헌병대]]의 사찰을 위한 비용까지 삭감되어서 하세가와 시절엔 [[일제]]의 [[무단 통치]]가 무단 통치가 아닌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른다. 사실 하세가와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데라우치가 조선을 조슈 군벌 외에 다른 자들에게 줄수 없다고 억지로 끌어와서 앉힌 판국이었다. 이러한 나날은 말년까지 이어져서 [[일본 제국|일제]]에 도움이 된 [[토지 조사 사업]]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사망하면서 [[3.1 운동]]이 일어나고,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. 심지어 [[대한제국]]의 기독교도들도 탄압을 하였는데, 대표적으로 [[제암리 학살 사건]]을 저질렀다. 하지만 이로 인해 [[조선]]은 물론 [[일본]]과 해외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통치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냐는 비판을 받아 하세가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. 그와 같은 파벌인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도 [[시베리아]] 출병, 쌀 사건으로 인해 퇴임하면서 동시에 몰아닥친 [[다이쇼 데모크라시]]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게 되는데 이후 [[일본]]에서 후임 [[조선 총독]]을 누구로 정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. [[하라 타카시]], [[다나카 기이치]]를 중심으로 하는 문민 총독론과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인 총독론이 강하게 대립했는데 이들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법제상으로는 문민 총독 임명도 가능하게 하는 대신 신임 총독에 해군 출신인 [[사이토 마코토]]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. 동시에 총독부 관제 개혁이 이루어져 절대군주와도 같았던 [[조선총독]]의 권한 및 [[총독부]]의 구성에 대해 손을 보게 된다. [[데라우치]]와 [[사이토]] 사이에 낀데다 [[3.1 운동]]의 폭풍으로 묻혀버린 인물인데, [[3.1 운동]]을 강경 진압한 장본인이면서도 이후 [[문화 통치]]의 큰 목적을 이미 구상해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. [[총독]]을 사임하면서 사이토에게 인수 인계와 함께 남긴 조언문이 제도와 통제를 완화하고, [[중추원(일제강점기)|중추원]] 구성과 양국인의 혼인 장려 등 [[내선일체|조선과 일본의 동화]] 수준을 높여나가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. 사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고 [[일본 제국]]에선 진작부터 [[조선]]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오히려 [[조선]]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무단 통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. 이후 [[니토베 이나조]] 교수 등이 주장한 동화 정책이 [[사이토 마코토]] 총독에 의해 채택됨으로 우리가 아는 문화 통치가 실시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